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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2016. 8.21 ] "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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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푸른하늘 작성일16-08-21 07:23 조회4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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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 오늘의 묵상 ]


                "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때"


                                          - 전삼용 요셉 신부님


- 2016. 8.21 연중 제21주일

루카복음 13,22-30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힘자랑 한창 하던 고등학교 시절 양치질을 하며 복도를 지나가고 있던 한 친구를 괴롭힌 적이 있습니다.
싸움 잘 한다고 소문 난 아이였습니다.

넘어뜨렸다 일으켰다 하며 나의 힘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나도 싸움을 하면 잘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는 양치질 하던 입에 가득 찬 거품을 삼킨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화를 내며 한 마디 던졌습니다.

“너 나 알아?”

그러고 보니 말 한 마디도 섞어보지 않던 친구였습니다.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좀 세다는 것.
그래서 그 아이를 이기면 서열이 매우 높아진다는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스스로 잘 안다고 착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아이를 이용하여 나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면 이용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다고 스스로 착각하며 그 아이를 이용한 것이지만,
그래서 아무리 안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는 나를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나도 실제로는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깎아내리는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영광을 주는 사람만 안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저도 사제인지라 신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저를 만났던 기억을 되새기며
아는 신부님이라는 것을 내세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때 미사 끝나고 신부님이 아녜스 자매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저도 함께 인사 나눴잖아요?”

이런 상황에서는 기억나지 않아도 반갑게 인사해 주어야합니다.
그 사람에게 영광을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것이 또 고마워서 더 기억해 줄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분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 나를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모님이 부끄러워 길을 지나면서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던
아픈 기억을 간직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부모님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이면 자녀를 위해서라도 부모님도 모른 채 하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마지막 심판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모른다고 하시면
그것보다 큰일은 없을 것입니다.
분명 우리도 할 말은 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분께로부터 배우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미사 안에서의 친교까지 갔었음을 말합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런 말까지 합니다.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마태 7,22)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그러나 과연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르실까요?
뒷말까지 더 읽어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불의를 일삼아 온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모르신다고 하시는 말씀은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모른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받고 싶다면 인정받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고 실천하는 이라야 주님께서 인정하실 것입니다.
인정하신다는 말은 영광을 준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안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는데
바로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세례는 아버지의 뜻에 순명할 것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이 성령의 힘과 함께 그 사람의 머리 위로 내려앉으십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영광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를 안다고 증언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렇게 당신께 영광을 올리는 아드님을 어떻게 모른다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한 요양원에서 불평쟁이로만 알려져 있던 노인이 세상을 떠났고
그의 방에서 한 편의 글이 발견되었습니다.
 간호사들은 이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나를 성격도 알 수 없는 까다로운 늙은이라고 보는 것을 잘 안다.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양말도 한 짝씩 잃어버리기 일쑤였던 나.
그러나 한 때 나도 사랑을 했었고 신랑이었고 아버지였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었다.

40세가 되었을 때 아들은 내 곁을 떠났고
조금 있다가 아내까지 떠났지.
이젠 옛 기억으로만 살아야하는 오갈 곳 없는 늙은이.

심장이 있던 자리에는 돌 하나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젊었을 때의 열정을 지닌.
그러나 냉혹한 현실에선 여전히 피해만 끼치는 존재.

그리고 마지막엔 이렇게 끝맺습니다.

“너무나 짧았던 너무도 빨리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생각할 때마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냉혹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뿐이지.
그러니 이제는 눈을 뜨길 바라네.

사람들이여 눈을 뜨고 바라봐주시게.
까다로운 늙은이가 아닌 ‘나’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 봐주게.”
 
간호사들이 왜 그 노인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못했을까요?
그 노인 위에 서서 판단했을 뿐이지
그 노인의 내면과 깊은 뜻은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노인을 이용해 자신들이 젊고 똑똑하고 필요한 존재들임을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을 알아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당신도 알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분의 뜻 안에 우리 자신을 넣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표현합니다.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좁은 문 안에 있어야만 주님께 이해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좁은 문이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 주님께서 당신이 안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다면 겸손하게 상대의 뜻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를 이용하게 되고
“너 나 알아?”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정받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뜻,
즉 이웃사랑이라는 좁은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온 세상아 주님을" : https://youtu.be/vgeLo48t-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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